조선시대 사람들은 하루 몇 끼를 먹었을까? 동서양 식사 문화의 기원과 진화


전통 사회에서 사람들의 기본적인 식사 횟수는 하루 두 끼가 주를 이루었으며, 이는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침밥과 저녁밥을 먹는 것이 일상이었으며, 따라서 하루 식사를 조석(朝夕)이라고 지칭했습니다. 만약 조석 사이에 식사를 하게 되면 이는 ‘낮밥’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특별한 경우에만 먹는 식사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점심’이라는 용어가 당시에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는 점입니다.

1. ‘점심(點心)’의 본래 의미: 식사가 아닌 간식의 개념

점심(點心)이라는 용어는 15세기 초 태종실록에 처음 등장하지만,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의미의 점심 식사는 아니었습니다. 원래 중국 당나라에서 유래된 이 말의 본래 뜻은 ‘마음에 불을 부친다’는 것으로, 배고플 때 컨디션을 회복시키려는 목적으로 허기를 겨우 면할 정도로 조금 먹는 ‘간식’ 수준의 식사를 의미했습니다. 식사량은 매우 적었으며, 허기가 지지 않으면 따로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옛날 사람들은 점심을 시간적인 의미와 상관없이 필요할 때 여러 번 먹기도 했으며, 조점심, 석점심, 주점심 등으로 지칭하는 말도 다양했습니다.

이처럼 점심은 가벼운 요깃거리의 개념이었기 때문에 크게 한 상을 차려 먹지는 않았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주 점심 메뉴는 밥 조금, 미역 몇 줄기 혹은 김치 몇 조각이 전부였으며, 심지어 궁궐에서도 밥에다 물을 말아먹는 정도였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이와 유사하게 영어의 ‘lunch’ 역시 원래는 ‘조금 먹는다’는 뜻에서 파생되었는데, 이는 스페인어의 ‘고기 한 조각’이 어원입니다. 이처럼 동서양 모두에서 점심의 의미는 ‘간식’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했으며, 점차 조선 후기로 가면서 ‘낮밥’과 혼동되어 사용되었습니다.

2. ‘이른밥’의 등장과 동서양 아침 식사의 기원

조선시대에는 요즘은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식사가 있었는데, 바로 ‘이른밥’입니다. 한자로는 조반(早飯)으로, 아침 식사를 의미하는 조반(朝飯)과는 구별되었습니다. 관료들이 특히 이 ‘이른밥’을 챙겨 먹었는데, 이는 한 달에 여섯 번 정도 새벽 5시경에 진행되던 조회에 늦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새벽 4시쯤 일어나 간단하게 먹던 이른밥은 보통 ‘흰죽’이나 율무로 만든 ‘응이죽’과 같은 가벼운 음식이었으며, 해가 짧은 겨울철에 더 많이 먹었습니다.

이러한 ‘이른밥’의 개념은 서양의 ‘breakfast’와 여러 면에서 그 의미가 통합니다. 전통 사회에서 서양 사람들은 주로 점심, 저녁으로 하루 두 끼를 먹었는데, 중세 유럽에서 ‘fast’가 단식을 의미했기에, 아침에 공복을 깨트린다는 의미로 가볍게 먹는 식사를 ‘breakfast’라고 불렀고 이것이 근대에 들어 ‘아침 식사’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즉, 조선시대의 ‘이른밥’은 전통시대 서양의 ‘breakfast’와 그 배경 및 목적이 유사했습니다. 다만 조선시대에는 18세기 이후 ‘朝’와 ‘早’의 음가 혼동으로 인해 ‘이른밥’이라는 용어는 점차 사라지고 ‘아침 식사’만 남게 되었습니다.

3. 하루 세 끼의 확산: 농사철의 ‘새참’과 관료들의 ‘낮밥’

조선시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하루 두 끼를 먹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1년 중 절반 정도는 하루 세 끼를 먹었습니다. 하루 세 끼를 먹었던 시기는 농사철과 정확히 일치했는데, 에너지 소모가 극심했던 농사일(쌀농사는 밀농사보다 평균 세 배 정도 노동력이 더 필요함) 때문에 두 끼만으로는 곤란했기 때문입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약 6개월간 농촌에서 먹던 이 낮밥을 ‘새참’이라고 했습니다.

농사꾼들만 낮밥을 챙겨 먹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관청에 근무하는 관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당시 조선에는 관료들에게 점심을 주기 위한 예산까지 따로 책정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예산이 유용되면서 문제가 발생했고, 선조 임금은 “나라 형편도 안 좋은데 신하들은 뭘 자꾸 먹겠다는 겁니까? 앞으로 점심값을 대폭 깎도록!”이라며 고위 신료들에게만 점심값을 지급하고 하급 관리들에게는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급 관료들은 하루 12시간의 긴 근무 시간 동안 배고픔을 견디기 위해 집안 머슴들을 시켜 밥을 싸 오게 했는데, 이것이 도시락의 효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머슴들이 머리에 이고 가기 편하도록 상다리에 구멍이 뚫려있고 가벼운 은행나무 재질로 만든 점심상을 ‘공고상’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농사철의 새참, 관료들의 낮밥 등은 모두 ‘특식’의 개념이었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쌀의 풍족한 생산(이앙법 등)에 힘입어 ‘+ 알파 값’이 점점 커지게 됩니다. 18세기 이후에는 가난한 사람이라도 보통 하루 평균 2.5끼를 먹게 되었고, 19세기 중반 기록에는 조선 사람들이 2월부터 8월까지는 하루 세 끼, 9월부터 1월까지는 두 끼를 먹었다는 내용도 나타나면서 세 끼 식사가 보편화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4. 왕과 부자들의 식사 횟수와 조선의 식생활 변화

조선시대는 신분과 재력에 따라 식사량과 횟수에서도 철저한 차별이 존재했던 사회였습니다. 부잣집에서는 일하지 않는 사람조차 하루에 일곱 끼를 먹는다는 한탄이 기록에 남을 정도였습니다. 반면, 왕의 경우 보통 초조반, 조수라, 낮점심, 석수라, 야참의 형태로 기본 다섯 끼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왕이 그랬던 것은 아니어서, 영조와 정조는 검약 생활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 밥, 김치, 장만을 올린 수라상을 하루 두 끼만 먹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는 식생활의 큰 개선이 있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농법의 혁신으로 쌀이 풍족해져 조선시대 사람들의 1인당 쌀 소비량은 오늘날 한국인보다 세 배 가까이 많았고, 육식의 확산까지 더해져 성인 남성의 평균 키가 고려시대 155cm에서 조선시대 161cm로 증가하는 등 신체적인 변화도 있었습니다. 국가적으로 ‘난로회’와 같은 고기 먹는 날을 세시풍속으로 정할 정도로 육식이 일반화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조선시대 사람들의 식사는 ‘조석’ 두 끼가 기본 마인드였으나, 사회 후기로 갈수록 농사철의 ‘새참’과 재력에 따른 추가 식사로 인해 하루 2.5끼~3끼가 일반화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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